하이데거는 존재를 묻는 철학의 본질을 ‘죽음을 향한 실존’으로 정립하였고, 라캉은 주체의 분열과 무의식 구조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였습니다. 이 두 사유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출발했지만, ‘주체는 자신의 중심에 부재를 품는다’는 공통된 인식 위에 교차합니다. 본 글에서는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인간 실존의 본질과 무의식의 구조를 새롭게 조명하는지, 그 철학적·임상적 함의를 고찰합니다. 실존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묻는 현대철학의 핵심 축입니다.
존재의 틈과 무의식의 목소리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가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존재입니다. 이 물음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존재를 물을 수 있는 존재(Dasein)’로 나타나며, 라캉의 정신분석에서는 ‘욕망하는 주체’로 구체화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실존임을 강조하며, 이러한 유한성 인식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래성을 일깨우는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 라캉은 주체는 언어 안에서 구성되며,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 속에서 작동하는 구조라고 보았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과 사유 체계를 가진 두 사상가는 그러나, 공통적으로 ‘주체의 중심은 비어 있다’는 통찰에 도달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언제나 자신을 은폐하거나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체험될 수 있다고 말하며,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불완전한 실존이라고 보았습니다. 라캉 역시 주체는 완결된 자아가 아니라, 상징계 언어 속에서 구성되는 결핍적 존재로 파악합니다. 이러한 공통 인식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실체로서가 아닌, 부재와 결핍을 중심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나’라는 고정된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되고 미끄러지는 주체이며, 이 주체는 자기 자신의 중심으로 결코 도달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하이데거와 라캉은 각각 실존철학과 정신분석이라는 다른 틀에서, 인간 존재가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구조를 제시합니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사상가가 어떻게 ‘무의식’과 ‘실존’을 통해 인간 존재를 설명하며, 그 교차점에서 어떤 새로운 통찰이 도출되는지를 탐색해보고자 합니다. 존재는 무엇이며, 무의식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 두 물음은 결국 동일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부재하는 중심, 무의식과 존재의 해체
하이데거와 라캉은 각각 철학과 정신분석이라는 다른 담론에 위치하면서도, 인간 주체를 중심으로 한 사유에서 유사한 지점에 도달합니다. 핵심은 바로 ‘결핍’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항상 ‘아직 되지 않은 존재’이며, 그 존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유한성과 자유를 자각합니다. 그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를 구성해나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실존은 결코 고정되지 않으며 언제나 미래 가능성 속에 열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라캉은 주체의 분열 구조를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여기서 상징계는 언어의 질서이며, 주체는 이 언어적 체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명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명명 행위는 항상 실패를 내포하며, 진정한 ‘나’는 언어화되지 않은 실재계에 남아 있게 됩니다. 즉, 주체는 언제나 자기를 정의하면서 동시에 미끄러지는 언어의 구조 속에서 결핍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라캉의 무의식은 단지 억압된 욕망의 저장소가 아니라, 구조 그 자체로 기능합니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그의 명제는 무의식이 의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일정한 법칙을 따라 작동하는 장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은폐/드러남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우리에게 ‘은폐되었다가 드러나는’ 방식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존재는 언제나 비어 있고 다가오며 또한 미끄러지는 개념입니다. 이는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의 개념, 즉 상징화되지 못하는 외부의 압력과도 상응합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중심에 도달하려 하나, 그 중심은 결코 완전하게 도달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실존과 무의식은 모두 인간이 자신에 대해 끝없이 묻고자 하는 존재임을 전제로 하며, 그 물음은 항상 부재하는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는 점에서 철학과 임상의 경계를 허문 깊은 사유를 공유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
하이데거와 라캉의 사유는 인간 존재를 ‘스스로에게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정의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언제나 자기 존재를 물을 수 있는 특수한 존재자라는 점에서 존재의 문제를 열어두었고, 라캉은 주체가 언어 구조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오인하고 미끄러지는 존재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구조를 해석했습니다. 이 두 관점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한다는 철학적/심리학적 공통 이해를 바탕으로 만납니다. 이 교차점에서 인간의 고유성은 결핍 속에서 더욱 도드라집니다. 인간은 본질을 갖는 존재가 아니라, 결여를 중심으로 스스로를 창조해나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해지지 않으며, 항상 어떤 부족함 속에서 의미를 추구하고, 해석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무의식은 이 과정에서 언어와 상징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구조이며, 실존은 그 무의식을 통과하며 자기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실존과 무의식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상호 보완적 개념입니다. 철학은 인간이 ‘왜 존재하는가’를 묻고, 정신분석은 ‘그 물음조차 왜 일어나는가’를 해명합니다. 두 사유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의 창조성과 윤리의 출발점이라는 통찰을 공유합니다. 무의식은 존재의 그림자이고, 실존은 무의식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만들고 해체하며, 다시 질문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철학’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실존의 요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