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철학자'로 불리며, 인간의 경험과 존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언어 이전의 감각적 의식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언어를 매개하지 않는, 전언어적인 지각과 신체적 감응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전언어적 경험의 본질과 그것이 철학적으로 갖는 의미를 살펴봅니다. 또한 이러한 개념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 이해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찰합니다.
우리는 언어 없이 무엇을 인식하는가?
현대 철학은 오랫동안 언어를 인간 존재와 사유의 중심으로 삼아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처럼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는 말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주된 방식이 언어라는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이러한 언어 중심주의적 사고에 도전하며, 인간은 언어 이전에도 세계를 경험하며 의식을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전개한 전언어적(pre-linguistic) 의식 개념은 언어 이전의 신체적 감각, 지각, 분위기, 리듬, 움직임 등을 포함합니다. 즉, 인간은 말을 배우기 전부터, 또는 개념으로 세계를 구조화하기 이전부터 이미 세계 안에서 감각하고 반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아이의 존재 방식, 무언으로도 감정이 통하는 신체 언어, 예술의 감응력 등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경험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신체를 단순한 물질적 도구가 아닌, 세계와 만나는 ‘의미의 장’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물을 본다는 행위조차도 단순히 눈이라는 기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신체의 감응 구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신체 감응은 개념이나 언어보다 먼저 작동하며, 그것 자체로 하나의 인식 행위이자 존재 방식입니다. 이러한 전언어적 경험은 존재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세계와의 관계를 개념화 이전의 감각적 관계로 회복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근원적 구조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통해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며, 의식이란 고립된 주체 내부의 사유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적 상호작용임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몸과 세계의 경계, 감각은 말보다 먼저 도달한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데카르트식 이원론이나, 후설의 초월적 자아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있는 신체'를 철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는 신체를 단순히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가 아니라, '지각하는 주체 그 자체'로 간주합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살아 있는 몸(le corps propre)’ 개념입니다. 그는 인간이 사물을 지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타인과 소통하는 모든 과정이 언어 이전의 ‘신체적 감응’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이는 단순히 반사적인 생리 작용이 아니라, 세계를 ‘살며 느끼는’ 경험적 주체로서의 신체가 중심이 되는 철학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음악을 듣고 울컥하는 감정, 누군가의 표정을 보고 즉각적인 공감을 느끼는 현상은 언어 없이도 일어나는, 전언어적 경험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경험들이 결코 불완전하거나 미완의 사유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그는 언어화되기 이전의 감각이야말로 더욱 근본적이며, 그 감각 위에 언어와 개념이 구축된다고 봅니다. 즉, 언어는 존재의 기반이 아니라, 이미 살아 있는 세계와의 관계 위에 후속적으로 등장한 구조화의 수단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예술과도 깊은 관련을 갖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회화를 예로 들며, 세잔이 사물의 외형을 정확히 재현하기보다 그 사물의 ‘존재감’을 표현하려 했다고 평가합니다. 이는 곧 전언어적 감응의 시각적 구현이며, 세계가 인간에게 어떻게 먼저 '다가오는가'에 대한 탐구입니다. 결국 메를로퐁티의 전언어적 철학은 인간 존재의 뿌리를 사유보다 감각, 언어보다 지각, 개념보다 관계에 두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존재의 영역을 사유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전언어적 존재, 말하기 이전의 철학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언어 중심의 현대 사유 구조에 깊은 균열을 냅니다. 그는 인간이 말을 하기 이전에도 이미 세계를 ‘살고 있으며’, 그 삶은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의 층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전언어적 존재란, 단지 언어를 배우기 전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 존재 전반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지각 구조이자, 존재와 세계가 맺는 본래적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을 고립된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살아 있는 존재’로 재정의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단지 생각하고 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감각함으로써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험은 언어보다 먼저이며, 언어가 이를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현대 사회는 언어와 정보, 텍스트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지만, 오히려 이런 시대일수록 메를로퐁티의 전언어적 철학은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신체적 공감을 통해 의미를 형성합니다. 언어는 때로 우리를 가두기도 하지만, 감각은 우리를 다시 삶으로 이끕니다. 따라서 전언어적 의식에 대한 성찰은 단지 철학적 사유의 실험이 아니라, 인간 삶의 가장 본질적인 차원에 대한 사유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말하기 전에 무엇을 느꼈는가? 당신은 설명하기 전에 무엇을 살았는가? 이 물음은 모든 철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며, 존재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합니다.